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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견성에 대한 종곡스님의 관점카테고리 없음 2025. 6. 22. 09:51
종곡 스님의 관점에서 보자면, 깨달음을 일종의 ‘과위(果位)’—즉 공덕을 쌓은 결과로서의 지위로 설정하는 발상은 불교 수행의 본질을 심각하게 오해한 것이다. 이는 깨달음을 특정한 경지나 체험의 소유물로 전락시키고, 수행을 그 지위에 이르기 위한 사다리처럼 왜곡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스님은 이러한 관점이 결국 수행자들로 하여금 ‘깨달은 자’라는 자의식, 또는 ‘아직 깨닫지 못한 자’라는 결핍의식에 빠지게 하며, 이는 곧 자아 집착의 또 다른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종곡 스님에게 있어 깨달음은 공덕을 쌓은 보상이나 업적이 아니라, 자아에 대한 오해가 걷히는 순간적 자각, 즉 ‘관념의 전복’이다. 깨달음은 무엇을 성취하거나 축적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성취와 자의식을 근본에서 무화(無化)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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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출생주의에 대한 반론 모음집카테고리 없음 2025. 6. 18. 15:00
물론입니다. 아래는 당신의 핵심 사유를 최대한 살려, 상대 글의 주요 논점에 예의바르고 논리적으로 반박한 답변입니다. 요청대로 비트겐슈타인과 선불교, 니체를 공통선상에 두고, 베네타를 분석철학 내부에서 긍정하면서도 그의 전제 자체의 편향성과 한계를 지적하는 형식으로 서술했습니다.댓글 감사드립니다. 주신 말씀에서 여러 중요한 논점들이 제기되어 있어, 제 나름의 철학적 입장과 성찰을 덧붙여 조심스럽게 의견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말씀이 맞습니다. 베네타를 비판하는 방식이 그보다 더 큰 자기모순이나 불철저함에 빠져선 안 될 것이고, 저 역시 그것을 경계하려고 합니다.그런데 저는 베네타가 틀렸다고 말하기 이전에, 그가 어떤 지적 토양에서 철학하고 있는지를 먼저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분석철학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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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종에 대하여카테고리 없음 2025. 6. 17. 15:37
조동종(曹洞宗)은 중국 선종(禪宗)의 오가칠종(五家七宗) 가운데 하나로, 묵조선(黙照禪)의 전통을 대표하는 종파이다. 이 종파는 당말에서 오대(五代) 시기에 걸쳐 활동한 동산양개(洞山良价)에 의해 창립되었다.조동종의 수행은 간화선을 중심으로 한 임제종과 구별되며, 특히 공안을 들고 깨달음을 촉구하는 자극적 방식보다는, 조용히 앉아 고요히 자기 자신을 관조하는 묵조선을 핵심으로 삼는다. 이 수행은 화두를 놓고 의심하는 ‘화두선’과 달리, 언어와 개념, 의식적 분별을 모두 내려놓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관하고 머무는 데 중점을 둔다. 이 방식은 수행자에게 어떠한 깨달음의 목표도 설정하지 않으며, 도달해야 할 진리의 경지조차 긍정하지 않는다. 조동종의 수행은 곧 ‘좌선이 불법’이라는 전제 위에 성립하며, 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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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지스님에 대하여카테고리 없음 2025. 6. 17. 15:27
설지(雪池)는 21세기 한국 불교계에서 드물게 묵조선(黙照禪)을 정면으로 옹호하고 실천한 승려이자 저술가이다. 20대 초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실존적 물음과 깊은 죽음의 공포에 직면한 그는,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 선원에서 좌선을 시작하였다. 그의 수행은 단순히 불교 교리나 전통을 따르는 종교적 실천이 아니라, 존재와 고통, 죽음에 대한 근원적 탐구로 자리 잡았다. 그는 좌선 속에서 자아와 분별의 본질을 관찰하며, 선종에서 말하는 ‘현성공안(現成公案)’의 체험에 이르렀다.설지의 수행은 한국 선불교의 주류 방식인 간화선(看話禪)과 구분되는 묵조선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묵조선을 위한 변명』에서 묵조선이 결코 무기력하거나 공허한 침묵이 아니라, 언어와 사유 이전의 진실에 가장 근접하는 수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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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깨어있음”을 부정하는 자가 ‘무애’를 말할 수 있는가? ― 원제 스님의 깨달음 서열화 발언에 대한 비판카테고리 없음 2025. 6. 15. 09:36
“이미 깨어있음”을 부정하는 자가 ‘무애’를 말할 수 있는가?― 원제 스님의 깨달음 서열화 발언에 대한 비판“모든 것은 이미 이루어져 있다.”이 말은 단지 상투적인 위안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선(禪)의 심장부에서 고동치는 핵심 명제이며, U. G. 크리슈나무르티가 평생에 걸쳐 주장한 ‘되지 않음의 철학’(the impossibility of becoming)의 급진적인 형태이자, 묵조선에서 말하는 절대적 현성공안의 입장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수행이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러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확인하고, 그 확인 자체마저 놓아버리는 과정이다. 수행은 깨달음을 위한 전제도, 필요조건도 아니며, 좌선은 단지 앉아있음 그 자체로 ‘이미 그러함’을 반영하는 상징적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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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한 삶의 얼굴 앞에서: 선불교의 관점에서 본 반출생주의의 해체카테고리 없음 2025. 6. 11. 11:08
여여한 삶의 얼굴 앞에서: 선불교의 관점에서 본 반출생주의의 해체1. 들어가는 말 – ‘출생은 잘못’인가, ‘이미 이대로 충만’한가“출생은 해롭다.”“존재는 고통이다.”“삶은 오류이고, 죽지 않음은 죄악이다.”데이비드 베네타(David Benatar)의 반출생주의는 이런 선언들 위에 세워진 철학이다.그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고통으로 보고, 출생이라는 사건 자체가 도덕적 과오라고 주장한다.이 사상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초기불교의 고(苦) 사성제에 영향을 받았지만,궁극에는 자기 언어로 고통을 규정하고,그 규정에 따라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윤리적 결단에 이른다.그러나 선(禪)의 눈으로 보면, 이 모든 말들은마치 허공에 칼질하는 것과 같고,본래 없던 길 위에 이정표를 세우는 것과 같다.선불교는 고통을 인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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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라는 신화와 인간의 오만: 반출생주의는 어떻게 윤리의 경계를 넘는가카테고리 없음 2025. 6. 11. 10:49
인간은 자신의 지적 한계를 초월하는 우주적 맥락에서, 도덕적 진리를 선언할 수 없다.반출생주의는 인간의 불완전한 감각과 언어로 구성된 철학적 신화에 불과하다.고통이라는 신화와 인간의 오만: 반출생주의는 어떻게 윤리의 경계를 넘는가1. 서론: 고통의 철학이 도달한 곳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인간 존재를 고통의 의식적 감내로 정의했다.고타마 싯다르타는 삶 자체를 ‘고통(dukkha)’이라는 진리로 규정했고,현대에 이르러 데이비드 베네타는 그 계보를 따라“태어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라는 선언을 냈다.이처럼 반출생주의는 수천 년간 이어진 고통 중심의 형이상학을 윤리적 당위로 전환하며존재 자체의 거부를 윤리적 사명으로 변환한 급진적 철학이다.그러나 이 사상은 단순한 절망의 표현을 넘어존재에 대한 오만한 해석이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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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게임 속의 절망: 베네타의 반출생주의와 진리의 오해카테고리 없음 2025. 6. 11. 10:42
1. 서론: “고통은 진리인가?”데이비드 베네타(David Benatar)는 현대 윤리학에서 가장 논쟁적인 명제를 제기한 철학자 중 하나다. 그의 대표 저작 『존재하는 것이 항상 해롭다(Better Never to Have Been)』에서 그는 출생 그 자체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위이며,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것은 고통을 강제하는 가해라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한 염세주의나 비관주의를 넘어,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체계를 갖춘 **반출생주의(antinatalism)**라는 입장으로 발전된다.하지만 베네타의 논리적 정밀함, 고통의 비대칭성 논증, 도덕적 공리주의에 기반한 분석이 아무리 치밀하더라도, 우리는 다음 질문을 던질 수 있다:“그는 과연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아니면, 단지 자기 언어 안에서만 옳은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