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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깨어있음”을 부정하는 자가 ‘무애’를 말할 수 있는가? ― 원제 스님의 깨달음 서열화 발언에 대한 비판카테고리 없음 2025. 6. 15. 09:36
“이미 깨어있음”을 부정하는 자가 ‘무애’를 말할 수 있는가?
― 원제 스님의 깨달음 서열화 발언에 대한 비판
“모든 것은 이미 이루어져 있다.”
이 말은 단지 상투적인 위안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선(禪)의 심장부에서 고동치는 핵심 명제이며, U. G. 크리슈나무르티가 평생에 걸쳐 주장한 ‘되지 않음의 철학’(the impossibility of becoming)의 급진적인 형태이자, 묵조선에서 말하는 절대적 현성공안의 입장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수행이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러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확인하고, 그 확인 자체마저 놓아버리는 과정이다. 수행은 깨달음을 위한 전제도, 필요조건도 아니며, 좌선은 단지 앉아있음 그 자체로 ‘이미 그러함’을 반영하는 상징적 제스처에 불과하다.
그런데 최근 원제스님의 유튜브 설법을 보면 “대중과 자신 사이의 깨달음의 정도 차이”를 많이 암시하고 있다. 원제 스님은 자신이 ‘도달’한 단계를 은연중에 드러내며, 거기에 이르지 못한 대중을 일종의 ‘미도달 상태’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선종의 핵심 정신, 나아가 모든 존재가 본래 자성(自性)을 갖추고 있다는 불교의 대전제에 반하는 태도이다.1. "이미 모든 존재는 그러하다"는 철학의 맥락에서 본 모순
묵조선은 의도적인 개입이나 ‘도달’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한다. 좌선조차도 도구적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앉아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언어로 규정되거나, 위계적으로 정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좌선이 그저 앉아있음으로 충분한 이유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성취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U. G. 크리슈나무르티의 철학은 이를 더욱 극단적으로 밀어붙인다. 그는 “의식의 변화”조차 신경계의 조건 반사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떤 형식의 자기수련이나 체계화된 ‘발전’, ‘심화’란 심리적 환상이자 시간의 착각일 뿐이다.
원제 스님이 설법에서 “나는 어느 선에 도달했다. 너희는 아직 아니다.”라고 암시하는 것근 바로 이 ‘시간의 환상’—즉, 깨달음의 과정화, 선의 구조화, 자아의 계량화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진리의 자리에 자기를 세웠다.2. 경허 스님의 말년, 무애의 본질과 비교할 때
한국 근현대 선불교의 초석이라 할 경허 스님조차, 생애 말년에는 수행의 유의성 자체에 회의를 느끼고 환속해버렸다. 그것은 수행의 허무가 아니라, 자기를 포기한 자의 진정한 ‘무애’였다. 무애란 '모든 윤리와 형식을 초월한 방종'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완전한 투항이다. 자기를 강조하지 않으며, 언어를 떠나며, 계단을 거부한다.
그에 비해 원제 스님은 겉으로는 무애의 형식을 흉내내고 있다. 게임을 하고, 여행을 하고, 포교 방식을 기존의 형식에서 벗어나 유튜브로 대체하는 등 언뜻 보면 '틀을 벗어난 행위'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무애는 형식의 부정이 아니라, 자아의 소멸이다. 그는 오히려 형식을 파괴하는 ‘자신’이라는 자아를 더욱 드러내고 있으며, 그것은 선에서 말하는 “자기의 투명화”와는 정반대의 길이다.3. 무위법에 위계를 들이대는 자의 허위
깨달음은 어느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다. 구도자의 길은 획득의 길이 아니라, 놓아버림의 길이다. 그런데 원제 스님의 발언은 깨달음이 ‘어디에’ 있는지가 아니라, ‘누가’ 그것에 도달했는지에 더 초점을 두고 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찬양이다.
그는 "내가 너희보다 더 깨달았다"고 말함으로써, ‘차등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바로 선종이 그렇게 경멸하던 ‘중생의 언어’이며, 깨달음을 말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벌써 도가 끊어진다는 고언을 완전히 역행하는 행위다.
또한 이는 대중을 가르친다기보다 위로부터 내려다보는 방식으로 대중을 바라보게 하고, 진리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불성 평등 사상을 훼손하는 것이다.4. 무애행을 언어화하는 것 자체의 위험성
원제 스님은 자신이 무애행을 하고 있노라 말하는 듯 하다. 그러나 무애란, 그 자체로 침묵이어야 한다. 그것이 언어로 드러날 때, 그것은 이미 ‘행위’가 아니라 ‘전시’이며, 선이 아니라 이미지다. 무애는 이름 붙여진 순간, 죽는다.
진정한 무애란 스스로에게조차 무명(無名)이어야 한다. 그것은 대중을 설득하기 위한 도구도, 계단을 오른 자의 퍼포먼스도 아니다. 하지만 원제 스님은 마치 무애를 ‘스스로 취득한 자유’처럼 드러낸다. 이때 무애는 ‘성취’가 되고, 성취는 다시 자랑이 되고, 자랑은 계단이 된다. 그가 스스로 무애를 언급하는 순간, 그는 이미 무애가 아니다.🪷 결론 ― “가장 위대한 가르침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는 전해지지 않는다. 진리는 오직 사라짐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이 말은 선종의 근간이다. 원제 스님의 발언은, 진리를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리 위에 선 자기를 전시하려는 욕망의 변주처럼 보인다.
그는 말해야 할 때 침묵하지 않았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함으로써, 깨달음의 불가언성을 훼손했다.
무애는 이미 그러함의 수용이다. 그것은 도달이 아니라 자각이며, 계단이 아니라 평면이며, 설명이 아니라 침묵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깨달은 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