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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비드 베나타의 반출생주의의 오류, 논쟁의 평행성에 대한 고찰
    카테고리 없음 2025. 7. 5. 07:49

    1. 개요[편집]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존재하게 되는 것의 해악』(Better Never to Have Been: The Harm of Coming into Existence, 2006)에서 철학자 데이비드 베나타는 태어나는 것 자체가 언제나 해롭다는 급진적 주장을 펼치며, 출산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반출생주의(antinatalism)의 입장을 정당화한다. 이민열이 번역하였다.

    그의 논증의 핵심에는 쾌와 고통 사이의 비대칭이 자리한다. 즉, 고통의 존재는 나쁘고 쾌락의 존재는 좋지만, 고통의 부재는 그것을 누릴 존재가 없어도 좋은 것이며, 쾌락의 부재는 그것이 박탈로 작용하는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 한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비대칭성은 태어나지 않음이 고통을 피하게 하면서도 아무런 박탈을 낳지 않기에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베나타는 인간의 삶에 고통이 얼마나 만연하고 불가피한지를 강조한다.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뇌, 존재론적 불안, 인간 조건의 제약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를 들어 인간 존재 자체가 필연적으로 괴로움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설명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질과 출산 도덕성에 대한 판단이 낙관주의 편향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종교적, 문화적, 진화론적 이유 등 삶을 긍정하는 입장들을 비판하며, 타인의 의식적 존재를 통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해악이 그들이 경험할 수도 있는 어떤 잠재적 이익보다 도덕적으로 더 중대한 무게를 지닌다고 말한다. 이 책은 생명과 삶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뿌리 깊은 믿음에 문제를 제기하며, 부모가 되려는 도덕적 동기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결국 베나타는 고통을 피하려는 원칙적이고 이타적인 이유에서 출산을 중단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가장 옳은 길이라고 주장한다.[1]

    2. 반박과 재반박[편집]

    이 책은 출간 이후 철학계 내에서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으며, 몇몇 철학자들은 직접적으로 그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 논문이나 서평, 저술을 통해 반론을 제기했다.

    데이비드 드그라지아(David DeGrazia)는 베나타가 태어남이 언제나 해악이라고 주장하지만, 인간의 삶은 종종 큰 의미와 즐거움을 동반하며, 잠재적인 해악의 가능성만으로 출산이 비도덕적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주장한다. 출산은 위험을 수반하지만, 그것만으로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보기 어렵다.[2]

    제럴드 해리슨(Gerald Harrison)과 줄리아 태너(Julia Tanner)는 베나타의 핵심 비대칭 논증은 논리적으로 일관되지 않으며, 특히 쾌락의 부재가 나쁘지 않다는 주장은 상황에 따라 자의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자를 도덕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논리도 수용하기 어렵다고 본다.[3]

    엘리자베스 하먼(Elizabeth Harman)는 어떤 존재가 출산을 통해 생겨났다면, 그 존재에게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나았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존재 자체가 출산의 결과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익관심 역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4]

    테오 A.F. 판 빌리헌뷔르흐(Theo A.F. van Willigenburg) 와 피터 H.A. 스미트(Peter H.A. Smit)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도덕적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심각한 존재론적 문제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베나타의 주장에 내재된 모순—즉, 해악을 느낄 수 없는 존재에 해를 말하는 것—을 지적하며, 그의 논증이 실천 윤리에서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5]


    데이비드 베나타는 출간 이후 제기된 다양한 철학적 반론들에 대해 여러 논문과 인터뷰, 후속 저작을 통해 반박해왔다.

    고통의 부재는 좋지만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다는 주장이 임의적이거나 자의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그는 이 고통과 쾌락의 비대칭성이 직관적 도덕 판단의 핵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다양한 상황에서 일관되게 적용된다고 강조한다. 예컨대 우리는 새로운 고통을 예방하는 것에 대해 칭찬하는 것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새로운 행복을 만들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비교적 어색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오직 현존하는 존재만이 이익관심을 가지므로 가능세계 비교는 무의미하다는 비판에 대해, 그는 재생산 문제가 이례적인 사안임을 고려했을 때 어떤 가능세계에 존재하게 되는 개인의 해악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6]

    또한 대부분의 삶이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반론에 대해, 인간이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은 낙관주의 편향, 자아 방어기제, 문화적 세뇌  심리학적으로 입증된 왜곡에 기인한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해 내리는 판단이 신뢰할 만한 기준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는 반출생주의가 지나치게 비관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오히려 이 입장은 고통을 줄이고 삶의 조건을 윤리적으로 성찰하려는 가장 이타적이고 책임 있는 태도라고 보며, 이를 단순한 염세주의나 병적인 사고로 치부하는 것은 감정적 반응일 뿐 철학적 반박이 아니라고 일축한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출산을 긍정하는 수많은 문화적·종교적 전제들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보다, 존재 자체에 내재된 고통과 불확실성에 대해 철저히 성찰하고 그에 기반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더 성숙한 윤리적 태도라고 강조한다.

    2.1. 재반박의 오류[편집]

    드그라지아가 문제 삼은 것은 출산의 윤리성 판단에 있어 해악 가능성만으로 결론을 도출하는 베나타의 공리주의적 추론의 도약인데, 이에 대해 베나타는 심리적 편향의 개입을 들어 반박하려 했으나 이는 규범적 추론의 구조에 대한 철학적 반론이 아니라 인식론적 오류 지적에 그쳐 논점에서 벗어난다.[7][8][9] 분석철학적으로, 베나타의 반박은 드그라지아가 제기한 규범 윤리의 정당화 조건에 대한 논리적 문제제기에 응답하지 못하고, 대신 심리적·발생론적 설명으로 회피함으로써 논점을 전도하고, 도덕적 정당화의 기준을 흐리며, 개념적 엄밀성을 결여한 채 철학적으로 불완전한 재반박에 그친다.[10]

    해리슨과 태너가 지적한 쾌·고통 비대칭의 자의성과 논리적 일관성 결여에 대해, 베나타는 직관적 수용 가능성을 근거로 들며 논증을 정당화하지만 이는 분석철학적 엄밀성—특히 비대칭 명제를 보편적 규범으로 확장하기 위한 개념 분석이나 귀납·연역적 구조화—을 결여한다.[11][12][13]

    하먼의 존재론적 모순 지적은 이익관심의 발생 조건 자체를 문제삼는 반론인데, 베나타는 가능세계 비교를 통해 이를 회피하지만 이는 존재론적 지위가 불확정한 비존재자를 도덕적 고려 대상으로 전제하는 것으로, 카테고리 오류[14]를 범하며 반박에 성공하지 못한다.[15][16][17]

    판 빌리헌뷔르흐와 스미트의 존재론적 비판—즉, 해를 경험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해악 논증이 무의미하다는 지적—에 대해, 베나타는 재생산이라는 특수성으로 이를 정당화하려 하나, 이는 논점 회피에 불과하며 존재자-비존재자 구분의 윤리적 함의에 대한 본질적 해명이 결여된 반응으로, 실천윤리의 기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요컨대, 베나타의 '재반박'은 반론자들이 제기한 형이상학적·논리적·도덕적 문제에 대해 논리적 전제 재구성이나 개념적 정교화 없이 직관·심리·예외성에 의존함으로써, 분석철학의 기준에서 유효한 철학적 재반박이 되지 못한다.[18][19][20]

    2.2. 논쟁의 평행성[편집]

    베나타와 그 비판자들 사이의 논쟁이 결코 공통된 결론에 도달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들이 철학적 판단의 전제와 언어의 사용 방식, 그리고 도덕적 정당화의 방법론 자체에서 서로 전혀 다른 언어게임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나타는 쾌·고통의 비대칭성을 전제로 하여 존재 자체의 도덕적 정당성을 문제삼고, 이를 직관과 심리적 설명에 기대어 정당화하려는 공리주의적 접근을 취하지만, 그의 비판자들은 도덕 판단의 대상은 경험 가능한 존재자에 국한되어야 하며, 정당화는 개념적 정합성과 논리적 일관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메타윤리학적으로 보자면, 반출생주의 논의가 평행선을 달리며 합의에 이를 수 없는 근본적 이유는 도덕 판단의 정당화 기준과 도덕 언어의 사용 방식에 대한 상이한 전제 때문이다. 베나타와 그 비판자들은 각각 다른 도덕 메타이론—예컨대 공리주의적 직관주의 대 존재론적 실재주의—를 전제하고 있으며, 이는 곧 도덕적 개념(‘해악’, ‘가치’, ‘이익’)의 의미론적 지위와 규범적 정당화 방식 자체에 대한 불일치로 이어진다. 결국 이는 단순한 1차 윤리학 수준의 논쟁이 아니라, 도덕 언어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방식으로 정당화되는지를 둘러싼 메타윤리적 충돌이며, 이로 인해 반박과 재반박이 논리적으로 엇갈릴 수밖에 없는 구조를 낳는다.[21][22]

    조너선 하이트에 따르면, 도덕 판단은 추상적 이성과 논리적 추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정서적 직관에 의해 선행적으로 형성되며, 이성은 그 직관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후속적으로 동원될 뿐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베나타는 해악회피와 고통중심의 도덕성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해악/보호' 기반의 도덕틀을 채택한 반면, 그의 비판자들은 '자율성', '의미', '공정성', '존재의 가치' 같은 다원적 도덕 기반에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23]

    즉, 이들은 서로 다른 도덕 기저 모듈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으며, 그 차이는 언어적 분석이나 논리적 정합성의 문제를 넘어서 심층적이고 무의식적인 도덕 정서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양측은 동일한 언어로 말하는 것처럼 보여도, 서로 전혀 다른 도덕 심리학적 구조에 기반한 언어게임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개념 분석이나 논리 정비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화심리적 차이의 반영이다. 이처럼 존재론적 전제, 도덕적 관심의 방향, 개념 사용의 규칙, 철학적 정당화의 기준이 전면적으로 상이하기 때문에, 논쟁은 마치 같은 문제를 두고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철학적 규칙과 기대 속에서 말이 오가는 평행선 구조를 지닌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반박과 재반박은 무한히 이어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철학적 진전이라기보다 언어가 자기 자리에서 길을 잃은 상태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이 논쟁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바와 같이 철학의 역할이 진리를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가 어디서 길을 잃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업임을 상기시켜 준다.[24][25][26]
    [1]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 알라딘[2] "Is It Wrong to Impose the Risks of Harm? A Reply to Benatar" (2009)[3] "Better Never to Have Been Believed: Benatar on the Harm of Coming into Existence"* (South African Journal of Philosophy, 2011)[4] "Creation Ethics: The Moral Status of Early Fetuses and the Ethics of Abortion" (2009)[5] "The Metaphysics and Ethics of (Not) Being Born" (Bioethics, 2008)[6] 이때 프로크루스테스적 고집, 언어의 병에 갇힌 파리, 독단적 문자주의 등이 언급된다. 그는 비개인적(impersonal)으로도 해악이 성립할 가능성을 부정하진 않는다면서도, 자신은 그것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7] 데렉 파핏은 윤리적 판단의 정당화에 있어 심리적 직관이나 감정이 아닌, 규범적 이유의 구조와 그 일관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직관이나 심리적 설명은 설득의 수단일 뿐 정당화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명확히 한다. Derek Parfit, On What Matters, Volume On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31–40.[8] 스캔런은 정당화 가능한 이유가 없는 경우 도덕적 비난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논하면서, 규범적 이유 없이 심리적 설명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비판을 회피하는 전략에 불과하다는 점을 철저히 분석한다. T.M. Scanlon, What We Owe to Each Other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8), esp. 149–153.[9] 드그라지아는 베나타가 출산의 도덕성을 판단함에 있어 단지 고통이 발생할 가능성만으로 이를 비난하는 것은 도덕적 잘못의 성립 요건—실제 해악의 발생과 행위자의 책임 가능성—을 충족하지 못한 규범적 비약이며, 이에 대한 베나타의 심리적 편향론적 반박은 윤리적 정당화가 아닌 인식론적 회피에 불과하므로 논점을 벗어난다고 비판한다. David DeGrazia, “Is It Wrong to Impose the Risks of Harm? A Reply to Benatar,” Public Affairs Quarterly 23, no. 3 (2009): 159–168.[10] 코스가드는 규범적 명제의 정당화는 행위의 이유를 제공하는 자율적 주체의 이성적 정당화 구조에 달려 있으며, 단지 판단의 심리적 기원을 제시하는 것은 도덕적 비판이나 방어가 될 수 없음을 비판적으로 논증한다. Christine Korsgaard, The Sources of Normativit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10–15.[11] 퀘인의 고전 논문은 개념 간 관계와 명제의 보편성에 대한 분석철학적 기초를 정립하며, 의미론적 자의성과 경험적 확인 불가능성의 문제가 논리적 정당화의 결여로 이어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베나타의 자의적 비대칭 논증이 정당화되지 않은 직관에 의존한다는 문제를 지적하는 데 기초가 된다. W.V.O. Quine, “Two Dogmas of Empiricism,” The Philosophical Review 60, no. 1 (1951): 20–43.[12] 잭슨은 개념 분석이 도덕적 명제의 보편화에 있어 필수적이며, 단순한 직관적 수용 가능성은 보편적 규범 정립의 타당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논증한다. 이는 베나타의 ‘비대칭’ 개념이 정의 가능하고 일반화 가능한가?라는 기준에서 재검토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Frank Jackson, From Metaphysics to Ethics: A Defence of Conceptual Analysi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31–50.[13] 케이건은 윤리적 명제의 정당화에는 귀납적, 연역적, 또는 반례 가능성에 대한 구조적 논의가 필수임을 강조하며, 직관만으로 규범을 확립하는 접근은 도덕적 논증에서 정당한 논리적 구조로 간주될 수 없음을 명시한다. Shelly Kagan, Normative Ethics (Boulder, CO: Westview Press, 1998), esp. 9–18.[14] 카테고리 오류란, 어떤 개념이나 존재가 속하지 않는 범주에 그것을 억지로 포함시켜 논리적·개념적 혼란을 일으키는 오류이며, 베나타는 ‘비존재자’를 마치 도덕적 판단의 주체인 ‘존재자’처럼 취급함으로써 이 오류를 범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15] 스트로슨은 개념적 범주(category)의 오용이 철학적 오류의 근본 원인 중 하나이며, 특히 존재론적 지위가 확정되지 않은 대상에게 속성을 부여하는 행위는 잘못된 의미론적 귀속이라 지적한다. 이는 베나타가 비존재자에게 '해를 입는다'는 속성을 귀속하는 것의 오류를 설명하는 데 핵심 이론이 된다. P.F. Strawson, Individuals: An Essay in Descriptive Metaphysics (London: Methuen, 1959), 102–118.[16] 크립키는 가능세계에서의 존재자 동일성 및 지시(reference) 문제를 다루며, 존재하지 않는 대상(non-actual entities)에 대한 의미론적 지시가 가능하려면 실제 세계에서의 고정 지시자(fixed designator)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베나타의 비존재자 윤리가 의미론적으로 무효함을 시사한다.[17] 루이스는 가능세계에서 개체 중심적 태도와 존재론적 지위를 구분하며, 존재하지 않는 주체에 대해 평가적 태도를 부여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범주 오류임을 기술한다. 이는 베나타가 ‘존재하지 않는 자에게 해를 말하는 것’이 형이상학적으로 불가능한 판단 행위임을 분석적으로 뒷받침한다. David Lewis, “Attitudes De Dicto and De Se,” The Philosophical Review 88, no. 4 (1979): 513–543.[18] 나겔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해악일 수 있는가를 다루며, 존재자가 없을 때에는 해의 귀속 대상도 없다는 형이상학적 한계를 논증함. 이는 베나타가 비존재자에게 해를 논하는 방식이 도덕적 의미에서의 해악 개념을 왜곡한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Thomas Nagel, “Death,” in Mortal Question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9), 1–10.[19] 톰슨은 권리와 해악은 실제적 권리 보유자(actual rights-holder)를 전제로 한다고 보며, 존재하지 않는 개체를 권리나 해악의 논리적 대상으로 삼는 것은 철학적으로 부당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베나타의 가능세계 윤리학의 적용 한계를 정밀하게 지적하는 데 유용하다. Judith Jarvis Thomson, The Realm of Rights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0), 35–47[20] 윌리엄스는 의미 있는 윤리 판단은 존재자의 자아 동일성과 경험 가능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경험할 수 없는 자에게 윤리적 귀속을 시도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공허한 시도라고 비판한다. 이는 베나타의 입장이 실천윤리의 적용 가능성을 상실한다는 비판을 강화한다. Bernard Williams, “The Makropulos Case: Reflections on the Tedium of Immortality,” in Problems of the Self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3), 82–100.[21] 길버트 허먼의 논문은 도덕적 판단이 보편적으로 타당한 사실의 발견이 아니라, 사회적·심리적 관점 내에서 의미를 갖는 주장이라는 입장을 방어하며, 베나타와 비판자들 사이의 평행선 구조가 도덕 언어의 정당화 구조 자체의 불일치에서 비롯된다는 설명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 Gilbert Harman, “Moral Relativism Defended,” The Philosophical Review 84, no. 1 (1975): 3–22.[22] 브랜트는 도덕 판단이 하나의 '도덕 체계'(moral system)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서로 다른 체계들 간에는 판단 기준이 상이하다는 점을 분석한다. 이는 곧 베나타와 그 비판자들이 서로 다른 정당화 체계에 속해 있다는 설명과 직결된다. Richard B. Brandt, “The Concept of a Moral System,” The Philosophical Review 73, no. 3 (1964): 229–252.[23] Jonathan Haidt, “The Emotional Dog and Its Rational Tail: A Social Intuitionist Approach to Moral Judgment,” Psychological Review 108, no. 4 (2001): 814–834.[24]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rans. G.E.M. Anscombe, P.M.S. Hacker, and Joachim Schulte (Oxford: Wiley-Blackwell, 2009), §§23, 43, 109–133.[25] 다이아몬드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을 해석하며, 철학의 임무는 개념적 분명함을 통해 오해를 해소하는 것이지, 모든 철학적 문제에 객관적 해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이는 논쟁이 평행선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구조적 이유를 설명하는 데 매우 적합하다. Cora Diamond, “Wittgenstein, Philosophy, and Language,” in The Realistic Spirit: Wittgenstein, Philosophy, and the Mind (Cambridge, MA: MIT Press, 1995), 195–226.[26]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치유적(therapeutic) 접근으로 재해석하며, 철학의 목표는 언어적 착오에서 비롯된 문제를 논리적 해결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소”하거나 “통찰”하게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는 베나타 논쟁처럼 동일어 사용 속 상이한 언어게임의 충돌을 비트겐슈타인적으로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Alice Crary and Rupert Read, eds., The New Wittgenstein (London: Routledge, 2000), esp. introduction and chs.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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