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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와 엔트로피, 그 비가역성카테고리 없음 2025. 6. 28. 08:10
인간이 노화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데이비드 싱클레어와 같은 환원론적 과학자들의 관점은 겉으로 보기엔 설득력 있지만, 카를로 로벨리와 베르나르도 카스트럽 등이 지적한 근본적인 한계들을 고려할 때 사실상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첫째, 엔트로피 법칙은 카를로 로벨리의 시각에서 볼 때, 수학적이고 이론적으로는 극복 가능한 현상처럼 보일 수 있다. 로벨리는 엔트로피가 확률적 현상이며,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엔트로피 감소 현상조차 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 로벨리는 엔트로피가 단지 수학적이거나 물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본질적으로 불가해한 자연법칙의 일부임을 강조한다. 엔트로피는 단순히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동하는 현상이 아니라,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과 얽혀 있는 현상이며, 이는 우리가 현재 이해할 수 있는 물리학의 범주를 넘어서 있다. 다시 말해 엔트로피를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노력은 슈뢰딩거의 고양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같다. 고양이의 상태는 우리가 관찰하기 전까지는 양자적으로 중첩된 상태로 존재하며, 절대로 미리 결정지을 수 없듯이, 엔트로피의 근본적인 양자적 메커니즘 역시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싱클레어와 같은 과학자들은 노화를 생물학적 메커니즘의 환원적 분석을 통해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의 접근은 본질적으로 부분적이다. 노화란 인간의 생물학적 체계가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엔트로피 증가의 국지적 현상에 불과하다. 싱클레어가 발견한 노화 메커니즘은 확실히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발견임에 틀림없지만, 이것이 곧 우주 전체의 근본적 엔트로피 문제를 해결하거나, 인간 존재가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영속적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싱클레어의 접근은 근본적으로 생물학적 수준의 환원적 접근일 뿐, 로벨리가 말하는 우주의 미지의 양자적 현상이나 더 근본적인 불확정성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제공하지 못한다.
둘째, 노화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수학에서의 '무한' 개념과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다. 무한이란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만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결코 도달하거나 구현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이처럼 노화의 극복 역시 인간의 상상력과 욕망 속에서는 존재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영원히 도달 불가능한 지점이다. 이는 존 설의 중국어 방 문제와 베르나르도 카스트럽이 제기한 의식의 비환원성과도 유사한 논점이다. 설은 기계적인 프로세스만으로는 진정한 이해나 의식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즉, 단순히 알고리즘적 절차를 수행한다고 해서 '의식'이나 '이해'가 자연스럽게 창조되지 않는다.
카스트럽 역시 의식이 환원 불가능한 현상임을 강조하며, 실리콘 밸리의 기술 낙관론자들이 실리콘 기반의 기계로 의식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 시도에 대해 깊은 회의를 표현한다. 노화 극복을 믿는 데이비드 싱클레어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기술낙관주의적 환원론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더 깊은 차원의 복잡한 메커니즘은 결코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며, 이를 수학적으로, 혹은 기술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가정이다.
결국 인간은 우주가 가진 근본적인 미지성과 불확정성을 결코 완전히 극복할 수 없으며, 이것은 단순히 현재의 기술적 한계가 아니라 자연의 근본적 법칙 그 자체이다. 인간은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은 문제, 즉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양자적 불확정성을 해결할 수 없듯이, 엔트로피의 근본적 법칙과 이를 포함한 생물학적 노화의 문제 역시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따라서 데이비드 싱클레어와 같은 환원론자들의 노화 극복 주장에는 깊은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