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출생주의에 대한 반론 모음집
물론입니다. 아래는 당신의 핵심 사유를 최대한 살려, 상대 글의 주요 논점에 예의바르고 논리적으로 반박한 답변입니다. 요청대로 비트겐슈타인과 선불교, 니체를 공통선상에 두고, 베네타를 분석철학 내부에서 긍정하면서도 그의 전제 자체의 편향성과 한계를 지적하는 형식으로 서술했습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주신 말씀에서 여러 중요한 논점들이 제기되어 있어, 제 나름의 철학적 입장과 성찰을 덧붙여 조심스럽게 의견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말씀이 맞습니다. 베네타를 비판하는 방식이 그보다 더 큰 자기모순이나 불철저함에 빠져선 안 될 것이고, 저 역시 그것을 경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베네타가 틀렸다고 말하기 이전에, 그가 어떤 지적 토양에서 철학하고 있는지를 먼저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분석철학이라는, 말하자면 ‘기울어진 운동장’ 안에서 사고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계량 가능한 것처럼 다루고, 존재의 부정도 논리적 명제로 환원할 수 있다고 전제한 채, 말입니다. 저는 이 전제가 윤리적 실익을 극대화한다는 고전적 목적을 전제로 하지만, 실존적 모순 자체에는 눈을 감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문제는 베네타가 논리적으로 틀렸는가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못 보았는가에 있습니다. 분석철학 내부에서라면 그의 논증은 일관되고 꽤 강력합니다. 하지만 삶은 결코 분석철학적 명제들만으로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석철학은 세계를 “그려보는 방식”이지, 세계 그 자체는 아니며,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바로 이 국면에서 깊은 울림을 줍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저에게 ‘진정한 마지막 철학자’입니다. 그는 철학이 자꾸만 자기 혐오적 메타담론으로 빠져드는 것을 경계했고, 결국 철학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실익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니체 역시 존재의 비극을 넘어서려는 그리스 정신을 회복하려 했고, 선불교 또한 그와 깊은 친연성을 보입니다. 이들 철학은 공통적으로 ‘실존의 고통’을 해석하거나 제거하려는 태도 대신, 오직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직시함으로써 거기서 자유로워지고자 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선불교가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체화하는 분별 자체를 비워내려는 태도라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든 윤리, 모든 판단, 모든 언어적 정당화는 무위의 벽 앞에서 무너집니다. 베네타는 분명히 고통을 줄이려는 윤리적 동기에서 출발했지만, 삶 전체를 거부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면, 자기 모순을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삶 안에서 삶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성립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존적으로는 자기파괴적인 역설에 빠진 형식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자기모순을 명징하게 통과하려 했던 이들이 비트겐슈타인, 니체, 달마, 임제, 조주 같은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존재에 대한 논리적 정식화보다, ‘그럼에도 삶이 지속되는 이유’, '삶을 부정하려는 생각조차 누가 만들었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 존재를 온몸으로 관통하려 했습니다.
게다가, 논리의 틀에서 벗어나면, 베네타가 옳지 않다는 것은 시골 촌부도 직관적으로 압니다. 삶을 명제화하거나 정당화하지 않고도, 아침 햇살 속에 논에 나가 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고통과 기쁨을 구분 없이 품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살 만하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윤리 이전의 생의 긍정이며, 어떤 메타윤리보다도 더 깊은 실존적 신뢰에 기반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메타적 관점이 또 다른 가치 선언에 불과하다면, 모든 철학은 결국 자기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순을 인정하고 멈추는 것, 그 침묵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야말로 선불교적 직관이며, 비트겐슈타인이 도달한 마지막 철학의 자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오히려 윤리적 실익조차 부정될 수 있습니다. 삶은 효용의 극대화가 아니라, 고통과 기쁨이 혼재된 무차별의 장이고, 거기서 우리에게 남는 유일한 철학은 “오직 날것의 실존을 직시하는 것”뿐입니다. 제가 선불교를 옹호하고, 베네타를 그 한계 위에서 바라보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분석철학이 대세라는 말씀이야말로 분석철학 바깥에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는 선언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저로선, 분석철학이 강한 부분은 인정하되, 그것이 삶의 전체를 해명한다고 믿는 것은 일종의 ‘철학적 기술관료주의’에 빠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철학도 삶을 완전히 규정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태도야말로, 오히려 더 철학적인 것 아닐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비판적 견해 주신 점도 진심으로 존중합니다. 계속 좋은 논의 이어가길 바랍니다.
존재를 부정하는 논리, 존재 안에 머무는 직관
― 반출생주의에 대한 존재론적 비판
1. 들어가는 말: 정합성과 진리의 구별
반출생주의, 특히 데이비드 베네타의 주장은 분석철학적 맥락에서 정합적이다. 그는 고통이 필연적이고, 고통을 유발하는 출생이 도덕적으로 잘못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 과정은 매우 엄밀하며, 일종의 수학적 추론처럼 구성되어 있다. 그는 쾌락보다 고통이 더 빈번하고 깊으며,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구조 속에 인간 존재가 매몰되어 있음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한다.
이 주장은, 마치 초기불교에서 고성제(苦聖諦)를 설한 싯다르타와, 수학공리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괴델의 태도를 떠올리게 한다. 분명 반출생주의는 “삶에는 근본적인 오류가 있다”는 결론을 구조적으로, 논리적으로 도출해낸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논리적 정합성은 곧 실존적 진실인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명료하게 보여주듯, 어떤 체계 내부의 정합성은 그 체계가 설명하려는 전체 현실에 대한 총체적 진실을 보장하지 않는다. 베네타는 인간 경험의 일부를 모델링하여 그 안의 정합성을 강조하지만, 그 모델이 세계 전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점에서 오류를 범한다.
2. 불완전성 정리와 반출생주의: 전제의 한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형식체계의 한계를 증명한 것이다. 이 정리는 형식적으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는 역설적인 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괴델 자신은 이를 통해 “그러므로 수학은 의미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수학적 실재론(platonism)**을 받아들임으로써, 형식 바깥에 실재하는 진리가 있다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반출생주의가 “삶은 고통이므로 태어나는 것은 해롭다”는 결론을 정합적으로 이끌어냈다고 해도, 그 전제는 형식적으로 구성된 도덕적 계산 모델에 불과하다. 이 모델은 고통과 쾌락의 수량화를 전제하고, 삶의 복잡다단한 질적 경험을 생략한다.
즉, 반출생주의는 정합적인 오류다.
3. 존재에 대한 직관: 실재론적 긍정의 가능성
괴델은 자신의 불완전성 정리가 어떤 윤리적 결론이나 인간의 실존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형식의 경계를 넘는 **직관(intuition)**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의 철학은 플라톤적이다. 즉, 인간의 정신은 형식적 논리를 넘어선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
반면 베네타는 “삶은 고통”이라는 공리를 전제로 도덕적 결론을 도출하면서, 그 전제 자체를 초월적으로 비판하거나, 존재론적으로 재구성하지 않는다. 그는 분석철학의 규칙 안에서만 뛰고 있다. 이 점에서 베네타는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만 싸우는 것이다.
하지만 삶은 퍼즐이 아니다. 그것은 퍼즐을 두고 고민하는 자의 땀냄새, 숨소리, 실존 그 자체다. 반출생주의자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 안에 머무는 촌부의 지혜, 또는 삶 자체가 이미 하나의 답이라는 직관이다. 삶은 고통일 수 있지만, 그 고통을 인식하고 껴안는 주체의 존재는, 그 자체로 하나의 해명이다.
4. ‘본래면목’을 긍정하는 윤리
선불교는 “삶은 고통이다”라는 선언을 넘어서, **“고통도 공이다”**라고 본다. 이것은 단지 고통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고통을 실체화하는 언어 자체를 해체하는 태도이다. 베네타는 고통을 고정된 실체로 다루며, 거기서 도덕적 귀결을 도출한다. 그러나 그 도덕은 분별심의 산물이며, 삶의 본래적 상태에 대한 직관이 결여되어 있다.
우리는 존재론적 직관 앞에서 당위를 도출하는 대신, 존재 그 자체로 되돌아가야 한다. 당위는 파생된 개념이고, 존재는 근원적인 사실이다. 베네타는 후자를 전자의 근거로 삼으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시골 촌부는 이를 알고 있다. 그는 반출생주의적 결론이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살아 있는 진실이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에 거부한다. 그의 삶에는 '당위'를 넘어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선불교적 실존 긍정의 근거다.
5. 실존을 외면한 윤리는 자기파괴적이다
베네타가 출생을 부정할 때, 그는 삶의 내재적 구조에서 도덕적 명제를 도출한다. 하지만 그런 명제는 반드시 자기 파괴적인 결론으로 귀결된다. 태어나는 것이 잘못이라면, 사고 가능한 주체 자체가 잘못이고, 그런 사유도 무의미해진다.
이 모순은 존재론적 관점에서는 명확하다. “삶은 의미 없다”는 말을 하려면, 그 말을 하는 의미 있는 주체가 전제되어야 한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는 말을 하려면, 고통을 인식하는 ‘나’의 존속이 필요하다.
결국 반출생주의는 스스로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자가논박에 가깝다. 괴델이 보여준 불완전성 정리는 체계의 한계를 말했지만, 체계 외부에 존재하는 진리의 가능성까지 닫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삶의 고통스러운 구조를 인식했다고 해서,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오히려 그 모순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이 더 깊은 철학이다.
6. 결론: 반출생주의는 존재의 언어를 쓰지 못한다
반출생주의는 정확하고 논리적이며 분석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삶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모든 언어를 갖추고 있지 않다. 그것은 “삶을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답하지만,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앞에서는 침묵한다.
괴델은 퍼즐을 풀고도 퍼즐 너머를 응시했다. 그는 논리적 한계를 증명하고도, 실재하는 수학적 진리를 믿었다. 선불교는 고통을 인식하고도, 삶의 여여함을 노래했다. 촌부는 세상의 끝을 알지만, 씨앗을 심고 아이를 낳는다.
이 모두는 말한다.
“본래면목은 이미 여기에 있다.”
“출생은 잘못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향기다.”
우리는 논리로 이 세계를 부정할 수 있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논리보다 앞선다. 존재가 있고,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을 인식하는 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야 한다.
“이 존재는, 과연 오류인가? 아니면, 아직 말로 다할 수 없는 신비인가?”
삶은 논리로 끝나지 않는다: 감정, 실존, 그리고 반출생주의에 대한 변론
나는 반출생주의의 논리적 구조를 존중한다. 심지어 그 논리를 부정할 생각도 없다.
고통은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쪽이 낙관적 자기기만일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고, 사랑하는 이를 잃고, 고통스럽게 늙어간다.
삶은 확실히, 어떤 시점에선 반드시 견디기 어려운 무게로 다가온다.
그러니 베네타의 말—“출생은 해롭다”—는 단순히 감정적인 절망의 외침이 아니라, 그 고통을 가장 철저히 수량화하고 분해하여 도출한 결론이다.
그의 주장은 구조적으로 완결되어 있다. 분석철학의 문법 속에서, 논리적 일관성 속에서, 그는 아주 모범적으로 “삶을 부정”한다.
이 점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반출생주의적 결론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논리적으로 맞기 때문에 틀린 말이 아니라, 논리만으로 만들어진 말이 아니기 때문에 그 진실 전체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조너선 하이트를 소환할 수밖에 없다.
하이트는 『바른 마음』에서 인간의 도덕 판단은 이성적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 먼저 정서적 직관에 의해 내려진 다음, 사후적으로 이성이 그것을 합리화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느낌이 옳다고 느껴지는가’를 먼저 감지한다.
그 말을 듣고 처음엔 고개를 갸웃했다.
도덕이 감정에 의존한다고? 그럼 철학은 단지 기분 좋은 사람들의 글쓰기인가?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조차 자신의 감정의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천재성을 의심할 수 없지만, 동시에 세계에 대한 불신,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 무의식적인 분노를 품은 사람이었다.
그의 염세주의는 논리적이라기보다, 한 인간의 감정적 구조가 철학을 짓눌렀을 때 어떤 글이 나오는가의 예시였다.
베네타도 마찬가지다. 그는 차갑고 정제된 문장으로 말하지만, 그 밑바닥엔 ‘왜 세상은 이따위인가’라는 깊은 좌절감과 비감이 깔려 있다.
그는 ‘삶은 해롭다’는 명제를 증명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것을 느낀 다음, 논리적 수단으로 정당화한 것에 가깝다.
이게 왜 중요할까?
그 이유는, 같은 논리 구조를 가진 괴델은 삶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괴델은 누구보다 논리적이었던 사람이다.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수학이라는 체계가 자기 자신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그는 철저히 이성적이고, 형식주의에 비판적이었고, 수학의 기반을 내부로부터 파괴해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결론에서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수학적 실재론, 즉 인간의 이성이나 체계 바깥에도 진리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괴델은 삶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더라도, 어딘가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실재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는 베네타보다 논리적으로 부족했던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삶의 불확실성을 ‘모순’이나 ‘악’이 아닌, 받아들여야 할 조건으로 여겼다.
아인슈타인도 비슷하다.
그 역시 우주의 비인격적 구조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 사람이었지만, 삶을 ‘무의미한 오류’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우주의 침묵 속에서조차 경외를 느꼈고, 인류의 일시적 삶 안에서도 물리학적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러니 묻고 싶다. 삶의 구조적 고통을 모른다고 생각하는가?
노벨상 수상자, 필즈상 수상자, 천재 과학자들 중에도 자식을 낳고, 음악을 듣고,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삶의 고통을 몰라서, 삶이 결국 죽음으로 끝난다는 걸 몰라서 그렇게 사는 걸까?
그렇지 않다.
그들도 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절망의 논리로 재구성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삶을 분석하지 않는다.
삶을 살 뿐이다.
조너선 하이트가 옳았다.
도덕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다.
그리고 철학자들조차, 그 감정적 구조 위에서 글을 쓴다.
베네타가 ‘출생은 해롭다’고 믿는 것은, 그의 내면이 그렇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느낌이 먼저 있었고, 철학은 그 감정에 가장 적절한 논리를 제공해준 도구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삶을 긍정하는 철학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감정적 기초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고통을 품고도 견디겠다는 어떤 평온함, 또는 본래면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무심함에서 나온다.
선불교가 말하는 “이대로 좋다”는 태도,
촌부가 아침에 일어나 논에 나가며 말없이 지어올리는 미소,
그 모든 것들은 논리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삶의 긍정’의 증거들이다.
나는 베네타를 반박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그의 결론이 반드시 진리가 아니라, 특정한 감정의 굴곡에서 비롯된 하나의 해석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와는 전혀 다른 감정 구조에서,
삶을 긍정하고, 아이를 낳고, 시를 쓰고, 불교를 수행하고, 우주의 침묵 속에서 평화를 느끼는
또 하나의 세계관도 가능하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말한다.
베네타는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옳은 것도 아니다.
그의 철학은 그의 감정이 만들어낸 시일 뿐이다.
나에게는 또 다른 노래가 있다.
그 노래는 이렇게 말한다.
“본래 아무 일도 없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분다.
삶은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살아질 뿐이다.”
당신의 살을 걸지 않았다면, 당신의 윤리는 무효다
― 나심 탈레브의 관점에서 본 데이비드 베네타 비판
데이비드 베네타는 말한다.
"출생은 해롭다. 존재는 잘못이다. 인간에게 출생을 허락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그는 철학적 논증을 수행하며, 고통의 수학, 도덕의 공리화를 시도한다.
그의 문장은 논리적이고, 구조적으로 완결되어 있으며, 분석철학이라는 체계 내부에서 분명한 일관성을 갖춘다.
그는 자신이 정립한 공리 속에서 당당히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나심 탈레브의 목소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If you see fraud and do not say fraud, you are a fraud.”
"Only when you have skin in the game do you have the right to speak."
내가 탈레브의 말을 빌려 베네타에게 되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당신은, 이 명제를 주장할 만큼의 '살'을 걸었는가?
1. 철학은 말이 아니라 살이다
탈레브의 윤리철학은 간단하다.
진짜 윤리는 당신이 감내한 리스크, 감당한 고통, 그리고 감수한 책임의 총합 안에서만 존재한다.
'스킨 인 더 게임'이 없는 윤리 선언은, 아무리 고상하고 정합적일지라도 책임 없는 지식인의 ‘의미놀이’에 불과하다.
그는 영혼 없는 엘리트주의자들, 자신은 깨끗하게 살면서 타인에게는 윤리를 설파하는 ‘도덕적 위선자들’을 경멸한다.
그리고 나는 데이비드 베네타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 생각한다.
그는 대학 교수로서 안정적인 삶을 살고, 건강한 식사를 하며, 학문적 탑 속에서 글을 쓴다.
그는 고통의 본질을 논한다.
하지만 그는 고통의 세계를 살지 않는다.
그는 고통의 철학을 논한다.
하지만 그는 고통의 최전선에 서 있지 않다.
그는 태어나는 것이 해롭다고 말하면서도, 스스로 자살하지 않는다.
그는 출생이 잘못이라 말하면서도, 매 학기 신입생을 강의실에서 맞이한다.
그는 인간 존재를 문제 삼으면서도, 자기 존재의 특권은 포기하지 않는다.
탈레브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하고 싶으면, 먼저 당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걸어라.”
2. 베네타의 윤리는 ‘실익’이 없다
그는 말한다. "출생은 고통을 낳고, 고통은 해악이므로, 출생은 비윤리적이다."
좋다. 그럼 묻자.
그의 주장이 이 세계에 어떤 실질적인 고통을 줄여주었는가?
그가 채식주의자가 되어 동물의 고통을 줄이고자 노력한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채식만으로 전 지구적 고통을 의미 있게 감소시킨다고 믿는가?
그의 철학은 구체적인 세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진정한 윤리는 “내가 말하는 바가 현실에서 실현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데서 증명된다.
베네타의 철학은 ‘행위’를 동반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의 수치를 계산하고, 피해의 가능성을 이론화하지만,
그 논리를 가지고 세계를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 탈레브가 존경하는 윤리적 인간은 누구인가?
-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을 숨겨준 농부들
- 임진왜란 때 가족을 뒤로 하고 싸움터로 간 조선의 백성들
- 자식을 낳고 굶으면서도 보리밥을 나눠 먹은 촌부들
- 지게를 지고 산골을 돌아다니며 아픈 사람을 고쳐준 한의사들
이들은 모두 삶을 긍정했기에, 삶을 바칠 수 있었다.
그들은 출생을 해악으로 보지 않았고, 출생이 가져온 고통을 감내하는 방식으로 ‘윤리’를 실천했다.
3. 윤리는 피할 수 없는 고통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탈레브가 말했듯, 윤리는 강단에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과 전장과 병동에서 드러난다.
그는 교수들의 논문과 논리 대신, 장인과 전사와 부모의 행위를 통해 진리를 본다.
삶은 고통이다. 맞다.
하지만 그 고통을 감수하는 과정 안에서 인간은 윤리적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반출생주의처럼 고통의 가능성 때문에 출생을 거부하는 입장은,
사실상 인간이 윤리적일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윤리란 무엇인가?
윤리는 남을 위해 자기 고통을 받아들이는 행위다.
윤리는 살을 내어주고, 그 대가로 평화를 얻는 실천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윤리적 명제는, “출생은 해롭다”가 아니라,
“출생했기에 고통스럽고, 그 고통 덕분에 나는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가 되어야 한다.
4. 지식인이 자기 몸을 걸지 않으면, 그는 위선자다
탈레브는 단언한다.
“책임지지 않는 사람은 말할 권리가 없다.”
베네타는 삶이 고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 고통을 온전히 겪은 적이 없다.
그는 삶이 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 악을 개선하기 위해 자기 몸을 던진 적이 없다.
그의 철학은 유아적인 퍼즐 맞추기에 불과하다.
수학 문제처럼 세계를 논리화하고, 분석철학의 실험실에서 논리적 일관성을 맞춘다.
하지만 그 모든 논리가 가리키는 윤리적 세계는, 여전히 그에게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반면, 진짜 철학자는 그 말을 살아낸 사람이다.
석가모니가 자신의 삶을 버려 진리를 찾았듯,
예수가 고통 속에서 사랑을 실천했듯,
그리스 시민이 폴리스를 위해 피를 흘렸듯,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이 삶의 의미를 붙잡았듯,
윤리는 반드시 자기 몸을 통과해야만 진짜가 된다.
5. 삶을 긍정하지 않는 자는, 윤리를 실현할 수 없다
반출생주의가 위험한 이유는 단지 이론의 비관성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윤리를 실현하는 주체 자체를 부정한다는 데 있다.
삶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순간, 우리는 자기 자신의 실존을 무화시킨다.
그리고 그 실존이 무화된 자리에서는, 아무리 고결한 도덕도 실현될 토대가 사라진다.
윤리는 타인을 위해 자기 고통을 감수하는 사람 안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자식을 낳고, 양육하며, 눈물을 흘리고, 서로를 껴안는 삶의 연속성 속에서 드러나는 ‘증명된 말’이다.
철학이 진짜 철학이 되려면,
그 말이 살로 박혀야 한다.
탈레브는 말한다.
“윤리는, 자기 자신에게 비용이 따르지 않는 한 말할 수 없다.”
결론: 철학은 '희생의 기술'이다
베네타는 출생을 해악이라 말하며, 그것을 피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훨씬 오래된 철학을 신뢰한다.
그 철학은 이렇게 말한다:
- 태어났기에 고통이 있고,
- 고통을 겪었기에 남을 이해하며,
- 남을 위해 내 고통을 감수했기에,
- 나는 살아 있는 인간이다.
그것이야말로 탈레브가 말한, 진짜 윤리, 진짜 지성, 진짜 인간됨이다.
스킨 인 더 게임 없는 철학은 공허하다.
몸을 걸지 않는 윤리는 위선이다.
그리고 삶을 긍정하지 않는 자는,
이 세계의 고통을 치유할 자격조차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