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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는 윤회론자이며, 강병균의 존재론적 무아론은 그 부정을 대변할 수 없다

choikwangmo 2025. 6. 10. 15:02

석가모니는 윤회론자이며, 강병균의 존재론적 무아론은 그 부정을 대변할 수 없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 특히 뇌과학자이자 철학자인 포항공대 강병균 교수는 석가모니가 이른바 ‘존재론적 무아’를 주장했으며, 따라서 전통적인 윤회 사상은 부처의 본래 가르침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그는 “무아는 곧 윤회 부정”이라는 주장을 전개하며, ‘윤회를 상정하지 않고도’ 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고·무상·무아의 사유와 해탈 개념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본다. 이 관점은 과학적 관찰과 현대 철학적 언어틀에서 일면 타당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 경전과 수행 전통, 특히 일묵스님의 현대 해석에 근거할 때, 이러한 주장은 석가모니의 원래 가르침과는 분명히 괴리되어 있다.

1. 초기불교는 윤회를 전제로 한 구조적 교설이다

팔리 니까야를 비롯한 초기 경전들에서 윤회(samsāra)는 단지 하나의 상징적 비유나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고통(dukkha)의 근원과 해탈(nibbāna)의 의미를 해명하는 데 있어 핵심적 전제가 된다. 대표적으로 『디가 니까야』(Dīgha Nikāya),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 『삼윳따 니까야』(Saṃyutta Nikāya),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 Nikāya) 등 곳곳에 걸쳐 부처는 생사윤회의 흐름을 직접 언급하며, 그것으로부터의 해탈을 열반의 본질로 설명한다.

예컨대 『삼윳따 니까야』 15권 「근본품」(Anamatagga Saṃyutta)에서 석가모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도다. 존재들이 무명을 따라 탐착하여, 윤회를 거듭하였도다. 너희는 무수히 많은 어미의 자궁을 지나왔으며, 너희의 피눈물은 이 넓은 대양을 채우고도 남는다.”

이 인용은 윤회가 단지 존재에 대한 상징적 설명이 아니라, 실재의 고통스러운 연속으로 간주되었음을 보여준다. 만약 부처가 윤회를 단지 허구적인 은유로 간주했다면, 이처럼 반복적이고 세세한 언급들을 굳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맛지마 니까야』 36에서는 과거의 자신의 태어남에 대해 부처가 직접 고백한다.

“나는 많은 생을 거쳐 이 생에 이르렀노라. 과거에 이러이러한 삶을 살았고, 그곳에서 이러이러하게 죽고 다시 태어났노라.”

이 진술은 강병균식 무아론, 즉 “영속하는 주체가 없으므로 윤회도 없다”는 사고와 양립할 수 없다. 초기경전의 부처는 분명히 전생을 인정했고, 그것을 근거로 자신의 깨달음을 정당화하였다.

2. 일묵스님의 해석: “무아는 주체의 부재이지 인과의 부정이 아니다”

일묵스님은 초기불교 수행과 경전 해석에 정통한 대표적인 현대 한국의 수행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부처의 무아론이 결코 “주체 없음 → 인과 없음 → 윤회 없음”으로 이어지는 현대식 해석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일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아란 주체가 없다는 것이지, 인과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윤회는 ‘행위와 결과의 흐름’으로서 작동하며, ‘나’라는 주체는 실체가 아니지만, 업의 결과는 흐름 속에 나타납니다. 즉, ‘무아 윤회론’이 바로 초기불교의 입장입니다.”

이는 결정적으로, 강병균의 존재론적 무아 해석이 ‘불교는 본래 윤회를 부정한 것이다’라는 주장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논리를 뒷받침한다. 초기불교에서 무아는 오온에 실체적 자아가 없다는 것이며, 그 흐름 자체는 조건생기법(paṭicca-samuppāda)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에, 개인적 자아는 없지만 윤회의 인과적 연속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3. 윤회를 부정하면 초기불교 교설의 구조 자체가 붕괴된다

더욱이, 만약 윤회가 없다고 가정할 경우, 불교 수행의 목표인 열반은 무엇으로부터의 ‘해탈’인지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열반은 삼계윤회에서 벗어난 상태로 규정되며, 그렇지 않다면 단지 ‘현재의 고통으로부터의 평정’ 수준으로 축소된다. 이는 초기불교적 열반 개념과 모순된다.

또한 업(kamma)과 그 과보(vipāka)는 윤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석가모니는 “모든 존재는 업을 상속받는다”라고 말하며, 이것이 ‘수자타’, ‘앙굴리말라’, ‘데바닷따’ 등의 다양한 존재가 각각의 과보를 경험하게 되는 원리라고 설명하였다. 이를 제거하고 현대식 물리주의나 존재론적 무아론으로 환원할 경우, 불교 교설의 핵심적인 작동 원리들이 사라지게 된다.

4. 현대 해석은 가능하되, 그것이 경전의 뜻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강병균 교수의 해석은 윤회의 실재를 믿기 어려워하는 현대인의 심리에는 일정 부분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인의 해석틀'일 뿐, 초기경전에 직접 의거한 해석은 아니다. 그는 “무아이므로 윤회는 없다”고 하지만, 초기경은 오히려 “무아이므로, 나 없이 윤회가 있다”고 본다. 즉, 윤회의 작동은 ‘실체적 주체’의 유무와 상관없다. 업에 의한 조건적 흐름이 다음 존재를 낳는다는 것이 초기불교의 일관된 입장이다.

따라서 강병균의 존재론적 무아론은 석가모니가 윤회를 부정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초기불교의 철학 구조 자체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결론

초기불교 경전과 수행 전통, 그리고 이를 깊이 있게 해석한 현대의 스승들에 따르면, 석가모니는 명백히 윤회론자였다. 무아는 윤회의 부정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실체 없는 업의 연속적 흐름으로 윤회를 설명하는 정교한 구조로 작동한다. 과학적 관점에서 무아와 윤회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의미 있지만, 그것이 경전의 문자적, 수행적 맥락을 대체할 수는 없다. 석가모니는 '나'는 없다고 말했을지언정, ‘업의 흐름’은 있다고 보았다. 그것이 윤회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벗어나야 할 고통의 바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