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콩이의 잔잔한 긍정》
콩콩이는 처음부터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믿음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는 교회에서 신을 만났고, 누구는 절에서 깨달음을 찾았지만, 콩콩이는 항상 조용한 독백 속에서만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말하곤 했다.
“콩콩이는 착해. 하지만 어딘가 멀어.”
그 말은 맞았다. 그는 언제나 한 발짝 떨어져 세상을 바라보았다. 거리를 두는 것이 유일한 생존 방식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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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때 불교에 빠졌었다.
반출생주의와 닮아 있는 초기불교의 고·무·무상·무아에 매혹되었고, 팔정도와 연기를 이해하려 애썼다.
“일체는 고통이다.”
그 말은 마치 자신을 위해 쓰인 문장 같았다.
하지만 어느 날 절의 대웅전에서 목탁 소리를 들으며, 콩콩이는 문득 이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왜 이토록 고통을 지우는 데에만 몰두할까. 나는 살아남기 위해 고통을 견디는 법을 알고 싶은데.”
그는 불교의 철저한 탈욕구, 탈세계적 무관심을 존경했지만, 어쩐지 그 무관심이 사랑을 배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누구보다 사람을 사랑하고 싶었던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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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한때 기독교에 마음을 주었다.
그 신비하고 열정적인 믿음 속에, 한없이 따뜻하고 개인적인 구원의 메시지를 읽어냈다.
그는 예수의 고난을 읽으며 울었고, 어머니의 성경책을 몰래 펴보며 밤을 새웠다.
하지만 그도 오래가지 않았다.
신은 너무 많은 것을 약속했고, 너무 적은 것을 증명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 왜 이토록 체계와 도그마를 동반해야 하는가?
콩콩이는 구원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의 자비 아래 존재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결국 조용히 기도문을 접고, 아무도 없는 골목을 따라 걸었다. 그 길 위에서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는… 구원받지 않아도 괜찮아. 다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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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저속한 쾌락의 세계를 지나쳤다.
청년 시절, 그는 서울의 거리와 밤의 불빛 속에서 살았다.
성적인 것, 감각적인 것, 과잉된 소비와 감정. 그것들은 마치 그를 잠시 구해주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일찍이 그것들 위에 텅 빈 공백을 느꼈다.
쾌락은 그에게서 무엇도 약속하지 않았다.
그저 그날, 그 순간의 혼란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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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것을 거친 후, 콩콩이는 다시 순천으로 내려왔다.
거기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살기 시작했다.
산책을 하고, 마당에 쌓이는 낙엽을 치우고, 이웃에게 감을 나눠주고, 작은 책을 썼다.
그는 여전히 반출생주의자였다.
그것은 그의 방식으로 세상을 아끼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젠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이렇게 썼다.
“태어난 이들은, 서로를 덜 다치게 해야 해요. 존재가 고통이라면, 그 고통을 가장 적게 만들도록 노력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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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철학은 점차 변했다.
그는 더 이상 좌파적 도덕주의에 기대지 않았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그 불공평함은 구조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권력에 기대지 않는 삶을 꿈꿨고, 어느새 스스로도 놀랄 만큼 자유지상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세상은 구원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를 책임질 수 있다는 확신.
그는 이제 누구의 구조물 안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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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느 날, 그는 하이데거를 읽다가 마지막으로 웃었다.
“위대한 긍정이란, 존재 그 자체를 끌어안는 것.”
그는 그 문장을 그대로 옮겨 자신의 일기 마지막 장에 썼다.
그는 이제 세상이 두려워지지 않았다.
고통도 있었지만, 슬픔도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그 모든 것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하려고 애쓰며, 단순히 살아 있는 기쁨 자체를 긍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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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콩이는 말년에도 조용히 살았다.
아무 종교도, 아무 정치도, 아무 철학도 맹목적으로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매일 산책했고, 바람을 맞았고, 개 한 마리를 키우며, 마을 어린이들에게 수제 연을 만들어 주었다.
누구도 구원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해치지 않았다.
그가 남긴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나는 결국, 태어났음에 감사하게 되었다.
누가 그랬던가. 세상은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그렇기에 우리가 의미를 줄 수 있다고.
나는 의미 없는 세상에 의미를 조금 붙이고, 그 의미가 다른 이에게도 부드럽게 스며들기를 바란다.
그것이면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