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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존재론과 인식론에 대한 철학적 고찰

choikwangmo 2025. 6. 8. 16:26

물리주의를 넘어:
의식의 존재론과 인식론에 대한 철학적 고찰
― 베르나르도 카스트럽, 루퍼트 스파이라, 비트겐슈타인, 칸트를 중심으로


Ⅰ. 서론: 의식은 뇌에서 비롯되는가?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의식을 뇌의 산물이라 주장한다. 대표적인 예로 포항공대의 강병균 교수는 의식이란 결국 뇌의 신경 작용에서 비롯된 하나의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보며, 이를 통해 마음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환원하고자 한다. 이른바 물리주의(physicalism) 또는 의식의 뇌 생성설이다.

하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철학과 과학을 접목시키고자 하는 두 사상가, 베르나르도 카스트럽루퍼트 스파이라는 의식이야말로 우주의 근원이며, 뇌와 세계는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경험적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이상주의(idealism)**와 **비이원론(non-dualism)**의 현대적 재해석을 통해, 물리주의의 전제 자체를 해체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그들의 관점을 중심으로, 물리주의적 입장이 갖는 인식론적 모순을 칸트의 선험철학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이론을 통해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Ⅱ. 베르나르도 카스트럽의 이상주의: 실재는 의식의 구조다

카스트럽은 전자공학과 인공지능을 전공한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형이상학적 이상주의의 가장 논리적인 옹호자이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물질이 실재의 기반이 아니라, 의식이 실재의 기반이다.”

즉, 우리가 '뇌'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은 의식 안에서 인식되는 이미지에 불과하며, 의식 없이 뇌라는 존재조차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해 물리주의가 범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오류를 지적한다. 즉, 자신의 인식 주체인 의식을, 인식의 대상인 뇌의 부산물로 환원하는 자기모순이다.

여기서 우리는 칸트를 떠올릴 수 있다.


Ⅲ. 칸트의 선험적 인식론: 뇌는 결코 '것 자체(Ding an sich)'가 아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으며, 세계는 항상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험적 감성 형식을 통해 구조화된다고 보았다. 즉, 인식은 대상의 물리적 실재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식 주체의 구조에 의해 형성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강병균 교수가 말하는 '뇌' 또한 우리가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뇌 역시 **현상(Phänomenon)**이며, 우리의 인식 범주와 감각 형식 안에서만 존재한다. 다시 말해, '뇌가 의식을 만든다'는 주장은 선험적 조건과 결과를 뒤집는 인식론적 전도이다.


Ⅳ. 루퍼트 스파이라와 직접적 자기 인식: 언어 이전의 의식

루퍼트 스파이라는 철저한 경험적 직관에 기반한 비이원론자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의식은 증명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으며, 이 인식이 바로 존재의 기반이다.”

스파이라는 '의식은 뇌의 결과'라는 말을 언어적 오류이자 인식적 환상으로 본다. 우리가 '의식'이라는 말을 쓸 수 있으려면, 이미 의식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이론을 통해 물리주의가 빠지는 언어적 혼란을 들여다볼 수 있다.


Ⅴ. 비트겐슈타인: 의식은 언어로 규정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다음과 같은 언어게임을 예시로 들며, **“개인의 사적인 감정이나 경험조차도 언어라는 사회적 맥락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의식이나 고통, 감정과 같은 내적 경험을 외부의 물리적 설명으로 완전히 치환하려는 시도는 언어의 오용이라고 본다.

즉, **"의식이 뇌의 작용이다"**라는 문장은 사실상 그 의미작용 자체가 불가능한 언어게임의 혼동일 수 있다. 우리는 뇌파를 측정할 수는 있지만, 고통이 무엇인지, 고통이 '느껴진다'는 경험은 뇌파로 번역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의식은 뇌의 산물이다"라는 말은 단지 과학이라는 특정 언어게임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 기술적 명제일 뿐, 철학적 진리나 존재론적 설명으로 전유될 수 없다.


Ⅵ. 결론: 철학은 의식을 되찾아야 한다

물리주의는 의식을 대상화함으로써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의식은 모든 설명과 관찰의 전제 조건이며, 어떤 시스템이나 구조에 귀속될 수 없는 초월적 기반이다. 베르나르도 카스트럽은 의식을 실재의 근거로, 루퍼트 스파이라는 경험의 본질로, 칸트는 인식의 선험적 조건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 바깥으로 위치시켰다.

이처럼 다양한 관점들이 한결같이 보여주는 것은 다음의 명제다:

“의식은 뇌 이전에, 언어 이전에, 과학 이전에 존재한다.”

강병균 교수가 상징하는 21세기적 신경중심주의는 이 명제를 거부하며 물리적 기계 안에서 '자아'를 찾으려 하지만, 결국 이는 자신의 거울상을 물 밖에서 찾으려는 어부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다시 묻는다.
"뇌가 있어야 생각하는가, 아니면 생각하기 때문에 뇌라는 세계가 생겨나는가?"

이 질문은 철학의 가장 오래된 주제인 동시에, 오늘날 가장 시급한 물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