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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 평론에 대한 다중 관점 비판

choikwangmo 2025. 6. 3. 15:26

제목: 교양의 감옥 — 『해피엔드』 평론에 대한 다중 관점 비판

『해피엔드』에 대한 한 역사 교사의 비평문은 감시사회, 기억의 정치학, 타자화, 교육적 연대를 논하며 진중하고 윤리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이 비평문은 겉으로는 비판적이지만 실제로는 교양적 위선과 이념적 클리셰, 그리고 책임 회피적 감정 소비로 점철되어 있다. 다음은 이를 다양한 철학적, 지식사회학적 시각에서 비판한 통합적 분석이다.


  1. 📏 나심 탈레브 – 리스크 없는 양심팔이
    비평가는 타르코프스키를 인용하며 깊이의 소유자처럼 행동하고, 『해피엔드』를 감상하며 도덕적 감수성의 대리인처럼 군다. 그러나 그는 "피부를 걸지 않는다". 학교 안에서 타인의 고통을 해석하며 안전한 도덕 유통자로 머무를 뿐, 어떤 실천도 책임도 지지 않는다. 탈레브 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예술적 고통엔 감응하지만 실제 고통엔 철수한 자"이며, "피부 없이 정의를 말하는 자"이다 — 탈레브가 가장 혐오할 부류다.

  1. 🏛️ 피에르 부르디외 – 상징자본화된 도덕 감수성
    비평 속 '교사로서의 감동'은 실은 교사라는 직업적 정체성과 도덕 감수성을 통해 상징자본을 축적하는 행위에 가깝다. 그는 감동을 해석함으로써 학생들 앞에서 윤리적 우월성을 표출하고,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정당화한다. 이는 연대가 아니라 계급화된 감수성의 실천이며, 교육이 아니라 권위의 제스처다.

  1. 🔮 매트 리들리 – 이성적 낙관주의의 결여
    이 평론은 구조적 억압, 감시, 타자화만을 강조하며 끝없이 비관적 담론에 머문다. 그러나 인류는 전반적으로 자유, 권리, 교육의 영역에서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어 왔다. 리들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평론은 역사적 맥락 없이 순간적 억압만 확대하며 현실의 긍정적 진보 가능성을 전혀 보지 못하는 전형적 '좌파 엘리트식 세계 인식'이다.

  1. 🕵️‍♂️ 앨런 소칼 – 말장난으로 위장된 비판의 허위성
    비평문에 등장하는 "기억의 정치학", "감각의 폭력성", "비언어적 연대의 잠재성" 등은 포스트모더니즘적 말장난에 가깝다. 앨런 소칼이라면 이 글을 두고 "말의 무게를 모르는 사람의 학문놀이"라 일갈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개념들은 ChatGPT나 진중권이 훨씬 더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즉, 감상을 위한 감상, 모호함을 위한 모호함 — 탈레브가 혐오하는 위선이다.

  1. 🔍 자크 데리다, 푸코, 라캉, 들뢰즈 등 – 비평의 인용 포르노
    타자화, 기억의 정치학, 판옵티콘, 연대… 이 비평은 현대철학의 키워드를 즐비하게 나열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이론도 밀어붙이지 않고, 아무런 구조적 분석도 제공하지 않는다. 데리다, 푸코, 들뢰즈, 라캉, 크리스테바… 이름만으로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국 말장난이다. 말은 구조를 흔들지만, 비평가는 자기 구조(교사, 문화엘리트, 감정소비자)를 전혀 흔들지 않는다. 착하게 살자는 메시지에 불과한 공허한 도식이다.

결론: 감정의 교양화, 비판의 사유화
이 비평가는 감정을 교양으로 소비하고, 타인의 고통을 해석의 자원으로 삼으며, 아무런 피부도 걸지 않은 채 감시와 구조를 논한다. 그는 말한다 — "말해지지 않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 그러나 정작 그가 듣는 목소리는 자신의 윤리적 자아가 듣고 싶어하는 것뿐이다.

『해피엔드』는 구조를 말하지만 구조를 뒤흔들지 않으며, 이 비평가는 연대를 말하지만 실천은 없다. 이는 타인의 고통을 인용하여 자기 감수성을 포장하는, 고급 교양이라는 이름의 윤리적 미장센이다. 즉, 리스크 없는 양심팔이, 그리고 책임 없는 감상의 정교한 장치다.